환자 중심 의학으로서의 한의학교육
“근거와 환자 중심성을 균형 있게 가르치는 것이 미래의 한의사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을 기르는 방법”

한상윤 원광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원광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좋은 한의사는 어떤 사람일까?” 학생들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이다. 학생들의 답은 다양하게 나온다.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한의사, 침과 약을 능숙하게 쓰는 한의사, 지속적으로 질병과 치료 기술에 대해 연구하는 한의사 등 저마다의 기준을 말한다.
그러나 질문을 “환자가 원하는 한의사는 누구일까?”로 바꾸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환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한의사, 질병 치료뿐 아니라 마음까지 돌보는 한의사, 환자의 삶을 함께 바라보는 한의사라는 답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는 질병 중심의 패러다임과 환자 중심(patient-centered)의 패러다임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환자를 중심에 둔다는 철학은 한의학의 본질 중 하나였다. 한의학은 오랜 기간 동안 환자의 체질, 정서, 생활환경, 사회적 배경까지 통합적으로 고려해 진단하고 치료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의료 환경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다. 만성질환 증가, 고령화, 복합 질병, 의학정보의 폭발적 증가, 환자의 권리의식 강화 등은 의료 현장에서 새로운 역량을 요구한다. 환자들은 자신의 질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고, 설명을 더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듣고 싶어 하며, 치료 과정의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고자 한다.
따라서 한의사들도 본래 한의학의 환자중심 철학을 지키되 시대가 요구하는 의료인의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환자 중심의 한의학 교육이 재정의되고 실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의 한의학 교육은 여전히 ‘지식 중심’
그러나 현실의 한의학 교육은 여전히 ‘지식 중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개별 교과목들의 방대한 지식을 암기해야 하고, 진급과 유급을 결정짓는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를 이해하고 의사소통하는 능력, 환자가 처한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치료의 선택지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기술은 상대적으로 교육에서 덜 다뤄지고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임상실습에 나가서야 처음으로 환자와의 의사소통을 경험하고,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의 불안을 줄이거나 오히려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한다. 환자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들을 이해하며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는 교육은 단기간의 임상실습 기간 동안 충분히 이수될 수 없는 것이기에, 저학년부터 꾸준히 교육될 필요가 있다.
한의학교육의 방향이 단순한 지식 전달뿐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면,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싶다. 우선 환자 소통 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에 체계적으로 포함해야 한다.
의과대학에서는 이미 표준화 환자(SP)를 활용한 의사소통, 공감적 면담 훈련, 나쁜 소식 전달 교육 등 다양한 훈련을 운영하고 있다. 환자가 자신의 우려를 말할 때 그것을 끊지 않고 들어주고, 복잡한 치료 설명을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며, 환자의 감정을 인정하는 방식은 학습과 반복된 피드백을 통해 충분히 습득해야 한다.
의사소통 역량은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학생의 경우 이러한 교육을 통해 체계적인 훈련을 한다면 훨씬 향상된 의사소통 역량을 지닌 의료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환자 중심의 임상 실습 구조 재정비 필요
또한, 환자 중심의 임상 실습 구조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한의학의 장점은 ‘환자 맞춤형 진료’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습 현장에서 학생들이 환자와 충분히 대화하고 의사결정을 함께 경험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거나 환경적 제약이 크다.
임상 실습 과정의 평가에 환자 만족도, 의사소통 과정, 공감적 태도 등을 포함시키고, 한의학교육실에서 실습 환경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며 개선할 필요가 있다. 임상 실습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서 ‘함께 참여하고, 배우고, 성찰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한의학교육평가원의 인증 기준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임상 실습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 다만, 각 한의과대학의 실습 병원의 여건과 진료과별 특성을 고려하여 실습의 개선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의료 인문학과 윤리 교육의 강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진료는 기술이지만, 환자를 이해하는 일은 인문적 영역이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지, 질병이 삶과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환자의 배경과 감정이 치료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진정한 환자 중심 진료가 가능하다.
의사결정의 윤리, 환자 자율성 존중, 공익과 전문직업성과 같은 가치도 한의학교육에서 더 강조해야 한다. 간혹 학생들은 의료 인문학이나 의료 윤리와 같은 교과를 사이드 교과라 생각하고 학습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심지어 한의과대학의 교수님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인문학이나 윤리 교육은 한의사가 의료인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고양시킬 수 있는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의학 지식 학습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의학교육에서 인문학의 강화가 두드러지고 있는 추세가 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근거 기반(Evidence-Based)과 환자 중심성(patient-centered)을 통합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근거 기반 진료는 점점 중요해지고 있지만, 근거만 강조하면 환자의 목소리를 놓칠 위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가치, 선호, 삶의 맥락을 고려해 치료 계획을 함께 결정하는 일이다. 근거와 환자 중심성을 균형 있게 가르치는 것이 미래의 한의사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을 기르는 방법일 것이다.
한의학교육실, 환자 중심 교육의 방향 설정
이러한 변화의 기반을 만드는 조직이 바로 한의학교육실이다. 교육실은 교육과정 설계, 교수역량 강화, 학습성과 분석, 학생 지원을 총괄하며, 환자 중심 교육을 실제로 구현하는 핵심 조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의학교육실은 환자 중심 교육의 방향을 설정하고 교수·학생·임상현장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환자 중심 역량을 교육과정 전반에 통합하는 커리큘럼 맵을 구축하고, 교수자가 환자 중심 수업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교수법·평가법을 지원한다.
또한 임상 실습의 질 관리와 환자 중심 실습평가를 도입하고, 학생 정서지원·상담·회복탄력성 증진과 같은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의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환자를 치유하는 일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의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한의학의 전통적인 강점과 현대 의료의 요구를 통합해 미래의 한의사를 양성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한의학교육의 길이다.
출처 : 한의신문(https://www.ako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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